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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1장

by 갈렙과 함께 2023. 10. 14.

마태복음 21장:1-5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1 As they approached Jerusalem and came to Bethphage on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disciples,

  예수님께서 유월절 행사에 참석 하시기 위해 십자가 수난이 예고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은 하루 거리에 있으나 해발 900미터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3킬로 떨어진 베다니에 도착하셔서 하루 밤을 보내시고, 다음 날인 일요일에 벳바게에 도착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갈수록,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소문은 더욱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길을 걸으며, 비장한 각오를 하셨을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뜻을 실현 시킬 희생과 대속의 길을 장엄하게 걸어가셨을 것입니다.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2 saying to them, '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at once you will find a donkey tied there, with her colt by her. Untie them and bring them to me.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게 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1) 제자들이 나귀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 미래를 예견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2) 예수님은 평소에 항상 걸어다니던 길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 사실은 스가랴 9:9의 예언을 기억시키고 예수님이 메시야 이심을 확실히 알게 하십니다. 

3) 이제 예루살렘 모든 이에게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하시고, 이미 예고하신 수난을 당하신 후, 부활을 통해 인류구속 사역을 하실 시간이 다가옴을 알게 하십니다.

    창세기 49:10-12, 민수기 24:17, 이사야 9:6,11:1 미가 5:2 에 이미 예언된대로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래 대망해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슥 9:9의 예언을 완성시키기 위해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초라한 짐승으로,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심은 ‘겸손’을 상징입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타심으로 그 분의 순결한 품격을 암시합니다. 나귀를 타심으로 예수님이 평강과 겸손, 섬김의 왕이시며 예수님이 참 메시야 이심을 증거 합니다.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3 If anyone says anything to you, tell him that the Lord needs them, and he will send them right away.'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이 자신을 ‘주’ [호 퀴리오스]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단 한번 나옵니다. 이는 ‘주’ (Lord), 주 여호와를 암시하는 말로서 나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하다고 그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고, ‘주’는 주 예수 자신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신적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심으로 이해됩니다.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5 "Say to the Daughter of Zion, 'See, your king comes to you,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은 이사야 62:11, 후반부는 스가랴 9:9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과 그 주민 전체를 말합니다.

  ‘멍에 메는 짐승’은 ‘짐을 나르는 짐승’을 말하고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나귀가 그 역활을 했습니다.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동시에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예시합니다. 이 나귀는 아직 멍에를 메지않았으나 곧 무거운 짐을 메야 될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평의 길을 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모습과 나귀는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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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6-11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6 The disciples went and did as Jesus had instructed them.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7 They brought the donkey and the colt, placed their cloaks on them, and Jesus sat on them.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귀 주인에게서 나귀를 데려옵니다. 사람을 태우지 않은 나귀니, 따로 사람을 태울 안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으로 예수님의 안장을 만들어 드린 것 같습니다.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8 A very large crowd spread their cloaks on the road, while others cut branches from the trees and spread them on the road.

겉옷을 길에 편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례는 왕하 9:13절에 예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의 기록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보내려온 순례자 무리들은 종교적 열망이 가득찹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잘못 인식하여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정권을 잡을 통치자로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서 땅에 깔아서, 나귀가 나무가지를 밟고 지나가도록,지속적으로 깔아 놓았다는 미완료형태의 동사로 표현합니다.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9 The crowds that went ahead of him and those that followed shouted, 'Hosanna to the Son of David!'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삼하 14:4,왕하 6:26)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간구로 입니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간구’ ‘기원’ 과 기쁨, 환호 등의 의미가 포함된 구호처럼 사용되고, 찬양의 송영이나 기쁨의 환호로 이해되었습니다. (렘 31:7)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쁜 날에 해당하는 장막절의 일곱째날을 ‘호산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 다윗의 자손’은 어떤 사람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 라는 표현으로 단순히 왕의 후손, 왕족이 아니라 ,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 이심을 강조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 만세’라는, 의미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을 예수께 사용한 것에 대해 심히 반발합니다. (15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에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오시는 이’는 메시아 입니다.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0 When Jesus entered Jerusalem, the whole city was stirred and asked, 'Who is this?'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장면 (눅 19:41)이 생략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시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으로   성이 소동하여’ 들끓고 있습니다. 일전에 동방 박사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소동이 난 적이 있었으니,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군사지도자들은 ‘ 뜻하지 않은 왕의 출현’으로 다시 놀라고 마음이 동요되어 불안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큰 소동을 불러 일으킨,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 합니다,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1 The crowds answered, 'This is Jesus, the prophet from Nazareth in Galilee.'

   이 말을 한 무리는 베다니에서 예수를 쫓아온 자들이나, 종려가지를 흔들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보고 듣고도, 한사람의 선지자로만 이해하고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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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12-17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2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drove out all who were buying and selling there. He overturned the tables of the money changers and the benches of those selling doves.

  마가의 기록에는 예루살렘 입성하신 그 다음날, 월요일에 행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곳은 ‘지성소’ [나오스]가 아니라 ‘성전’ [히에론]의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지성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서  예배를 드리려 온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희생제사에 필요한 짐승, 나무, 새포도주, 소금, 기름등이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구원을 위임받고 있었습니다. 시장으로 바뀌어진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다시 돌리시려는 예수님의 정화 행위는 다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1)대제사장 같은 유대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 입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제사장들이 도입 했습니다. 상인들이 장사할 장소를 얻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는데 이 돈의 일부는 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상인은 제사장들의 묵인하에 부당하게 비싼 가격으로 제물을 팔고 있었습니다. (2)유대인의 형식적인 희생제사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주의와 경배가 얼마나 추한 것인지를 상직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집에서 가져온 제물은 흠이 있다고 판정내리고, 성전에서 파는제물만 완전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서 파는 것이 흠이 있는 것 알면서도 그것을 사서 제단에 바칠수 밖에 없었습니다.

  속제제물의 값으로 다른 나라의 돈을 사용하는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은 로마와 헬라의 표준화폐를 성전의 화폐로 전환하면서, 이 화폐로 반세겔의 성전세를 바치게 했습니다. 

  비둘기는, 문둥병자가 치료된 것을 확증받기 위해서, 여인이 해산후 정결례를 위해 속제제물로 드렸습니다. 소나 양을 드리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던 제물입니다.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3 "It is written," he said to them, "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but you are making it a 'den of robbers.'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사 56:7)을 인용하여 성전의 본래 모습인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임을 강조하십니다.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렘 7:11)를 인용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에 성전이 악용되었기에, 그 형벌로 성전이 멸망 당할 것이라도 예언 하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우상숭배를 일상으로 행하고도 성전에서 예배드리면 구원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주민들도 예루살렘 안에서는 자신들이 부당한 행위를 하여도 이곳이 성역이니 영원히 보호될 것이라는 자가당착적인 착각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잘못을 명백히 지적하십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선언하셔서, 모든 장사꾼과 그들과 결탁한 제사장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도 멸망할 것이라고 암시하십니다.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4 The blind and the lame came to him at the temple, and he healed them.

  마태는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쫓나내시고,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출입이 제한된 장애인들을 성전에서 고치십니다. 이들을 고침으로,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우위권,  ‘성전보다 크신 이’ 이심을 입증 하셨습니다.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5 But when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saw the wonderful things he did and the children shouting in the temple area, 'Hosanna to the Son of David,' they were indignant.

  ‘이상한 일’ 에서 ‘이상한’ 은 ‘비상한, 놀라운, 찬양할 만한’ 일들의 복수형으로 예수님이 육체적 장애인을 고치신 일과, 성전을 깨끗이 정결케 하신 일도 찬양받으실 일임을 나타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성전에서 소리지르지 말아야 되는데도, 아이들이 소리지르는 것은야단치지 않고 그들이 외친 말의 내용(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에 대해 분노합니다. 아이들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고백을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6 "Do you hear what these children are saying?" they asked him. "Yes," replied Jesus, "have you never read, " 'From the lips of children and infants you have ordained praise'?"

  시편 8:2절을 인용하십니다.  원래 다윗은 이 시에서 모든 혀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젖먹이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능력을 선포하실 것이니 따로 하나님의 대변자가 필요없다는 의미로 기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대상인, 이 고백 내용을 예수님은 이 내용을 메시야에 대한 찬미라고 재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찬미를 기뻐 받으셨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예언된 

‘메시야 찬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바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17 And he left them and went out of the city to Bethany, where he spent the night.

  베다니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베다니에서 그의 수난의마지막 며칠을 묵으신 것 같습니다. (막 11:19, 눅 21:37) 당시 예루살렘에는 명절을 찾은 27만명이 모였기에 숙박할 마땅한 거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체포되고, 구금되고, 사형당하실 때 )가 되기 전에   체포 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성밖에 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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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18-22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8 Early in the morning, as he was on his way back to the city, he was hungry.

 이 구절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기도하기 위해 이런 새벽에 거처에서 나오셨든지, 베다니 가시는 길에 노숙을 하셨을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시장하신지라’에서 예수님이 배고픔을 느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 (人性)을 분명히 알게 합니다. 이 구절로 예수님은 신(神)이시며, 인간의 육체를 임시로 취하신 상태이므로 아픔, 배고픔, 죽음, 모든 고통을 못 느낀다는 가현설(Docetism)은 진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신성을 겸비하신 메시야이십니다.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19 Seeing a fig tree by the road, he went up to it but found nothing on it except leaves. Then he said to it, 'May you never bear fruit again!' Immediately the tree withered.

 유대율법에는 길가의 무화과나무 열매은 따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신 23:24,25) 오늘날에도 무화과는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먹도록 개방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이 열매를 ‘가난한 자의 양식’ 이라 부릅니다. 무화과는 잎이무성할 때 그 열매도 함께 열립니다. (6월, 8월, 12월)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를 보신 것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막 11:13)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나무는 4월인데도 잎이 무성하여 시장하신 예수님의 눈길을 끌었고, 잎은 있으나, 때가 아니니 열매가 맺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징으로 표현하여 열매 맺지 못함을 나무라십니다. 1)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희생제사만 드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2) 잎만 무성한 무화과처럼 경건의 모양만 자랑하는 유대인의 생활 태도를 이 무화과 에 비유하여 나무라십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랑의 계명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주여, 주여” 입으로 만 주님을 찾는 선민의식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계십니다.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0 When the disciples saw this, they were amazed. 'How did the fig tree wither so quickly?' they asked.

  무화과나무는 때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호 9:10,율 1:7) 언약의 땅을 말할 때, ‘무화과 나무의 땅’이라 표현했습니다. (신 8:8) 사람들이 그 나무그늘에 앉아 있다는 것은 평화와 안녕을 상징합니다. (왕상 4:25) 그러나, 여호와께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고 죽게 하실때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해당됩니다. (시 105:33,렘 8:13)

 예수님 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선포입니다.  예수님 께서 3년간 예루살렘에서 가르쳤어도, 열매(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제자)를 얻지 못하셨기에 그 나무인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눅 13:7)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1 Jesus replied, "I tell you the truth, if you have faith and do not doubt, not only can you do what was done to the fig tree, but also you can say to this mountain, 'Go, throw yourself into the sea,' and it will be done.

  제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무화과 나무가 마를 수 있는가? 감탄과 찬미가 혼합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음이 있다면, 이 (감람)산에게 들려 바다에 던져져라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2 If you believe, you will receive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유대인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성전은 기도의 집이 되지 못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제사는 받지 않으십니다. 희생제사의 형식이 다 갖추어져 있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다 열납해 주시고 우리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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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23-27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3 Jesus entered the temple courts, and, while he was teaching,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came to him.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they asked. 'An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이 날은 화요일(막 11:27)이고 유대인, 남여, 아이들, 이방인들까지 모일 수있던 곳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자격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의 종교 진상조사단 같은 임무를 가진자들 일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숨겨진 의도는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자라고 선언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첫번째 질문은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보여주었음에도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라는 두번째 질문은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권위의 출처가 하나님이냐 사람에게서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에서 백성을 교훈 할 수 있는권한을 주는 것은 산헤드린이나 탁월한 랍비가 랍비가 될 사람의 타당성을 시험하고 그 정통성이 입증된 후에라야 허락됩니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4 Jesus replied, 'I will also ask you one question. If you answer me, I will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am doing these things.

  예수님은 대답을 피하려고 하신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 명확한 대답을 주고자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님의 질문을 깨달아 알도록 하고자 하십니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5 John's baptism-where did it come from? Was it from heaven, or from men?" They discussed it among themselves and said, "If we say, 'From heaven,' he will ask, 'Then why didn't you believe him?'

  세례요한은 그가 사역하는 동안 참된 예언자로 대중적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선포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요 1:29-37, 3:26-30)

  ‘하늘로부터’ 라는 말은 ‘하나님께로 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로 부터’라면, 요한의 세례는 그들이 받아 들여야 할 참된 행위가 되고,  ‘사람으로부터’라면, 거짓된 행동이 됩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 부터’ 온 것입니다.

  이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반격을 받고,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하늘로부터라 하면, 요한의권위를 믿지 못하는 것과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으니, 그런데도 왜 믿지 못하느냐고 질책받을 것을 걱정합니다.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6 But if we say, 'From men'-we are afraid of the people, for they all hold that John was a prophet."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할 존재는 하나님이어야되는데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7 So they answered Jesus, "We don't know." Then he said, "Neithe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am doing these things.

  그들은 모르는 척하며 위선적인 태도로 대답을 합니다.  산헤드린의 직무 중 하나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에 대한 판단을 모른다고 하며, 직무유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책무를 감당 못하는 자들이니, 그들이 그런 질문을 하고 그 문제를 판단 할 능력이 있는가를 문제 제기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답변에 거부할 근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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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28-32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8 "What do you think? There was a man who had two sons. He went to the first and said, 'Son, go and work today in the vineyard.'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로 비유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더 확장시키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맏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지도자, 율법주의자들과,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사함을 구하려 예수님께 나오는 세리와 창녀 같은 자들,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입니다.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9 'I will, sir,' but he did not go.

  맏아들은 아버지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그는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그런 태도를 뉘우칠 마음도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성전에서는 하나님 뜻에 따른다고 맹세하고는 성전밖에서는 맹세를 어기는 자들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0 "Then the father went to the other son and said the same thing. He answered,  " 'I will not,' he answered, but later he changed his mind and went.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답했으나, 바로 뉘우치고, 아버지가 명한 대로 합니다. 그는 양심이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않고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1 'Which of the two did what his father wanted?' 'The first,' they answered.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the tax collectors and the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ahead of you.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의 답은 두 아들 모두가 죄인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았으니 거짓과 위선의 죄를 지었고 둘째는아버지 명령을 완전히 거절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큰 아들은 예의 바르나 정직하지 않았고, 둘째는 정직하나 고집이 셉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으로 유대 교권 주의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죄하도록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이스라엘에서 일종의 천민 계급으로 그들은 죄인이고 소외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사회의 쓰레기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입니다. 세리는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걷었으니, 착복하는 자들, 강도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될 지경이었고, 동족에게 해를 끼치는 자로 매국노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심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 율법주의자들도 회개하면 나중에라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암시하십니다.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32 For John came to you to show you the way of righteousness, and you did not believe him, but the tax collectors and the prostitutes did. And even after you saw this, you did not repent and believe him.

  요한은 회개한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의의 길을 가르쳤습니다.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사역도 의로운 것입니다. 의의 길은 윤리적으로 좁은 길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그를 메시아로 영접하면, 평안한 의의 길, 안전한 대로로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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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33-41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3 'Listen to another parable: There was a landowner who planted a vineyard. He put a wall around it, dug a winepress in it and built a watchtower. Then he rented the vineyard to some farmers and went away on a journey.

  예수님 당시에는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팔레스틴의 경작지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설정하신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부재지주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소작인은 보통 반반의 비율로 주인에게 지대를 지불했습니다.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4 When the harvest time approached, he sent his servants to the tenants to collect his fruit.

  포도수확은 보통 9월에 합니다. 본문의 열매 거둘 때는, 성도들이 열심히 성결한 삶을 살아내면, ‘성령의 열매’ (갈 5:22)을 얻게 될 때, 혹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종’은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 선지자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서 사람들이 악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5 'The tenants seized his servants; they beat one, killed another, and stoned a third.

 농부들의 악행은, 모든 선지자들이 당한 악행을 비유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당한 것 (렘 20:1.2), 이사야를 죽인 것(히 11:37) , 스가랴의 고통(대하 24:20.21)들 많은 선지자가 당한 악행을 드러낸 것입니다.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6 Then he sent other servants to them, more than the first time, and the tenants treated them the same way.

  이스라엘은 끊임 없이 하나님의 거역하였고,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돌이키려 했습니다.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7 Last of all, he sent his son to them. 'They will respect my son,' he said.

  아들 까지 보낸 것은 주인이 최대한 인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아들은 예수님 입니다.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8 "But when the tenants saw the son, they said to each other, 'This is the heir. Come, let's kill him and take his inheritance.'

  악한 그들은 소작료를 내지 않고 포도원을 뺏고자 모의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불법적인 음모를 의미합니다.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39 So they took him and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수난 사건과 연관하여, 예수님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넘겨 재판 한 사실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0 'Therefore, when the owner of the vineyard comes, what will he do to those tenants?'

  주인이 올때는 하나님의 징벌의 때가 임박함을 나타냅니다.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1 'He will bring those wretches to a wretched end,' they replied, 'and he will rent the vineyard to other tenants, who will give him his share of the crop at harvest time.'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이 악한 농부가 받게 될 징벌이 무엇인지 스스로 말하게 하십니다. 악한 농부에 해당하는, 악한 종교지도자들을 그들 자신이 말한것처럼 비참한 종말을 당하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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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 42-46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2 Jesus said to them, "Have you never read in the Scriptures: "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the Lord has done this, and it is marvelous in our eyes'?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 말씀들은 모두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이 내용은 시편 118장 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행 4:11, 엡2:20, 벧전 2:7에도 인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의 배척했으나, 이방인들은 오히려 그를 영접함을 표현 했습니다.

 ‘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시편 118편에서는 다윗을 가리킨 말입니다. 다윗이 모든 건축자들(사울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배척 받고 생명이 위험해서 도망 다녔으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더욱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이 시는 이스라엘 민족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강대국에게 핍박받고 고통당했으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모퉁이돌’ 선택받은 민족으로 삼으시고 축복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을 통해서, 악한 농부로 표현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에게, 당신이 버림받은 돌 (새 이스라엘를 건설할 메시야로 적합치 않은 자)이라고 말하십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 의 지붕이나 선물 바깥 외측면에 건물의 무게를 담당할 가장 중심이 되는 돌로 건물의 상부구조를 유지하고 전체 모양을 결정하게 됩니다. 다른 돌들도 모두 이 돌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예수, 모든 성도들과 예수의 관계는 건축물과 모퉁이 돌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모퉁이돌, 주춧돌이시며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인 (골 1:18)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  배척당한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신령한 건물인 교회, 즉, 성도의 영적공동체 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엡 2:20-22)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3 'Therefore I tell you that the kingdom of God will be taken away from you and given to a people who will produce its fruit.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유대 지도자들의 권한에서 벗어날 것을 언급하십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진다는 혈통상의 전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행 13:46,18:5,6, 벧전 2:9)  다만, 하나님의 권세로 율법을 전하던 특권을 가진 유대 종교지도자의 권한을 박탈하고, 그 나라의 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복음을 전하는 특권과 사명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4 He who falls on this stone will be broken to pieces, but he on whom it falls will be crushed.'

  예수님은 모퉁이 돌로서 거룩한 주춧돌로서 피하는 자에게 영적 보호처가 되겠지만, 악한 자에게는 멸망을 가져다주는 돌이 되십니다. ‘돌 위에 떨어진다’는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앙에 의해 스스로 넘어지게되는 거침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 날에 악한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 인줄 알고

45 When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heard Jesus' parables, they knew he was talking about them.

  회개할 기회를 주려고 하신 말씀이었으나 그들은 회개하지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46 They looked for a way to arrest him, but they were afraid of the crowd because the people held that he was a prophet.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체포할 수있는 상황이었으나 공식적으로 여러 사람이 보는 상황에서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나사로가 부활한 사건 이후로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고 그 명분을 찾고자 예수님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요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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