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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2장

by 갈렙과 함께 2023. 8. 18.

마태복음, Matthew 12:1-5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 At that time Jesus went through the grainfields on the Sabbath. His disciples were hungry and began to pick some heads of grain and eat them.

  ‘그때’는 안식일에 밀이 익은 것으로 추측하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4월 유월절과 칠칠절 (5-6월) 의 중간에 있는 어느 안식일로 추정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후 안식을 취하신 날이니,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하고 안식을 취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를 어기면, 죽음 같은 형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출 20:9, 신 5:12)

  ‘밀밭 사이를 가실 새’ 에서 밀밭 사이의 의미는, 팔레스틴의 경작지는 대부분 길고 좁은 이랑으로 되어 있어 그 이랑 사이에 통로로 사용되는 길을 걸어 가신 것을 말합니다.다. 안식일에 여행 할수 있는 거리는 약 1.8킬로 이내이니 가까운 곳을 통과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 조항을 잊을 정도로 그들이 몹시 배가 고팠고,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활동은 시간을 다투며, 급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시킵니다.

  ‘이삭을 잘라먹으니’ 이 행동은 율법에 의하면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평행구절인 누가 6:1에서 ‘손을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에 해당됩니다. 이삭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버리는 것도 정미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신명기 23:25에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했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2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said to him, "Look! Your disciples are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바리새인들이 보고’ 이 말은 그들의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집단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라고 말하는 대상은 제자들 이지만, 초점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잘못한다고 말하며 사사건건 트집거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규정은 모세율법이 아니라 전승되어오는 기록인 할라카에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나 기근이 심한 경우는 안식일에도 법법이 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구를 상용하는 것은 금했습니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3 He answered, "Haven't you read what David did when he and his companions were hungry?

이는 사무엘 상 21:1-6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사울을 피해 호위병 몇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떡으로 주린 배를 채웠던 일을 말합니다.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12개의 떡을 먹음으로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었습니다.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 다음날인 안식일에 

진설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외의 경우를 허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약자체가 다윗의 그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게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보다도 전해 내려오는 유전을 더 귀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는 사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4 He entered the house of God, and he and his companions ate the consecrated bread-which was not lawful for them to do, but only for the priests.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5 Or haven't you read in the Law that on the Sabbath the priests in the temple desecrate the day and yet are innocent?

두번째 예외 사례입니다. 안식일 법은 출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중 제 4계명을 근거로 둔것입니다. 아무일도 할수 없다고 하는 규정이 있지만, 성전에서 매 안식일 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깃행위와 진설병을 대체시키는 것 (레 24:8)과,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 등의 직무를 행해야됩니다.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의 하위법이고 성전에 대한 것은 상위법이니,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은 범해도 된다고 구약성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이 안식일 제사를 드릴때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대속 사업과 복음 전파를 돕는 것이 예배와 동일하니 이들의 행위는 과오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율법에 예외적이나 분명히 안식일에도 노동이 가능하다고 명시된 것을 지적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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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6-8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6 I tell you that one greater than the temple is here.

  ‘성전보다 더 큰 이’ 이신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성전법이 안식일 법보다 더 상위법이듯이, 예수님의 활동이 성전법보다 더 우선 되십니다.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7 If you had known what these words mean,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you would not have condemned the innocent.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종교행사로 여겨지는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닙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뜻인,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으로 율법보다 우선 되어야 됩니다. 자비와 제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할 피치 못할 상황이라면, 제사보다 자비를 먼저 베풀어야 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한 것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무죄한 자를 정죄 ’하는 잘못을 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니,이 말은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고픈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보다 크신 이가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8 For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예수님은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니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고,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십니다.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재한 주체적 운용자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십니다. 지금까지 가려졌던, 안식일의 참된 자유함과 참된 평안을 드러내시고 모든 이가 그것을 누릴수 있게 하십니다. 안식일 때문에 얽매이는 의무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권세를 예수님은 가지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까다로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도록, 그 멍에를 대신 져주시고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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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9-16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9 Going on from that place, he went into their synagogue,

   이 구절의  ‘떠나다’의 헬라어 동사 [메타바이노]의 일상적인 의미는 ‘자리를 바꾸다’이지만, 특별한 경우 이야기나, 화제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이 전면적으로 바뀜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평행구인 눅 6:6에 의하면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친날과 밀밭에서 제자가 이삭 먹던 날은 서로 다른 안식일 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의 회당’ 은 유대인들이 바벨론포로기와 에스라 통치시기에 성전과 율법에서 멀리 있는 유대인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전까지 480여개가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은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최초의 설교와 말씀을 전파할 때 이 회당을 이용했습니다. (행9:20)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0 and a man with a shriveled hand was there. Looking for a reason to accuse Jesus, they asked him, 'Is it lawful to heal on the Sabbath?'

  ‘한쪽 손 마른 사람’은 뇌의 손상이 일어난 중풍 때문이 아니라, 혈액순환의 이상으로 손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말합니다 (왕상 13:4). 누가6:6에 오른 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비온파가 사용한 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었다’고 말한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고소할 명문과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손마른 사람을 이용해서 그 기회를 삼으려던 그들의 악의는 성공하지 못하자, 아예 예수님을 직접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14절)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그 일이 ‘자비로운 일인가’라는 의미보다는 합법적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리는 상황은 시각을 다투어 치료해야 할 응급상황이 아닌데 왜 안식일에 고치느냐 라는 것입니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1 He said to them, "If any of you has a sheep and it falls into a pit on the Sabbath, will you not take hold of it and lift it out?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웅덩이 빠진 동물이 있으면, 먼저 안식일에 지낼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고, 만약 그 동물이 목숨이 위험하다면 사람이 들어가서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내도록 규정하고있습니다.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 How much more valuable is a man than a sheep! Therefore it is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양 한 마리보다 손 마른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식일에 양은 구할지라도 손마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고발할 도구로서 그 사람을 이용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그들에게 분명히 답하십니다.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맞다면, 불쌍한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옳다고 답하신 것입니다.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3 Then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So he stretched it out and it was completely restored, just as sound as the other.

 예수님은 다른 병자를 고칠 때 손을 직접 대시던 것과는 다르게,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고 하시고 그 말씀으로 치유의 기적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낫고자 하는 열망과 믿음이 깊었던 손마른 자는 예수님의 능력 으로 온전하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4 But the Pharisees went out and plotted how they might kill Jesus.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살의를 실천하고자, 정치적인 세력(헤롯당)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하심으로 생명을 구하신 안식일에 사람을 죽일 궁리를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정의롭다고 합니다.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5 Aware of this, Jesus withdrew from that place. Many followed him, and he healed all their sick,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회당을 떠나 피신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10:23)하는 법을 몸소 가르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이 아니고, 많은 병자들이었고 그들은 다 고침을 받게 됩니다.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6 warning them not to tell who he was.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한 기적을 행하는 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 모습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시킬 정치적 메시야이며 신적 권능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불치의 병을 고친것을 알게되면, 그들이 몰려와서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할 것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감당치 못하게 될 것이기에 함구 시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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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17-19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7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Isaiah:

 이사야 42:1-4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고난받는 종이신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에서 핍박받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만족 시킬수 있는 메시야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사역 방향이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천국은 영적이고, 의로운 관점의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국을 세우거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시킬 계획이 없으십니다. 로마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메시야를 기대하는 군중들을 선동하거나, 예수님의 신분을 노출 시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8 'Here is my servant whom I have chosen, the one I love, in whom I delight; I will put my Spirit on him, and he will proclaim justice to the nations.

‘내가 택한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상적인 한 종을 택하셨습니다. 선택한 자를 내밀하게 기억하시고 지극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소리(3:17, 17:5)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족하시고 인정하고 축복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이’에 대한 애칭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로 부터 ‘그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사 41:8). 이 ‘아이’의 의미를 지닌  [파이스]는 일반적으로 신분상의 종으로 불리는 ‘종’ [둘리스]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 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주신다는 것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활동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됩니다.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에서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역할이 메시야의 직무에 해당됩니다. ‘심판’에 해당되는 [크리시스]는 ‘율법’ ,’판결’, ‘결정하는’ 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미쉬파트]에 해당됩니다.

심판, 혹은 공의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 (사 51:4) 이며,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 된 하나님의 본성인 공의에 대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이 제자들이 할일 입니다.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9 He will not quarrel or cry out; no one will hear his voice in the streets.

메시야의 직무를 이행할때 행하는 방법, 혹은 태도 중 하나를 말합니다.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사야의 예언에서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아니하며’ (사42:2) 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들레다’ 의 뜻인 [크라우가조]는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인데 이는 종교적으로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를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에서,  귀신들이 나가면서 소리지르며, 알수 없는 소리 (막 5:5, 9:26)를 질렀다는 것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는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야의 자세를 표현 한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메시야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도 얼마든지 메시야의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참다운 종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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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20-21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0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nd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snuff out, till he leads justice to victory.

이 구절은 ‘종’이 자비심이 많고 오래 참으시며, 온유하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9:36)입니다.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말합니다. ‘상한 갈대’는 연약한 인간 (왕하 18:21), 고통과 좌절로 심령이 산산히 쇠잔해 있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운으로 소생할 수 있고, 꺼져가는 심지는 신령한 기름을 흡수하여 회생할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이스라엘, 심지를 이방인이라고 해석 하기도 합니다.

  ‘심판을 이길 때 까지’를 이사야서 42:4절에서,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 직무수행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 심판을 승리로 몰고 갈때 까지’ 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의 종인 메시야가 온유와 겸손과 섬김으로, 하나님의 공의로 악의 세력을 극복하고 세우게 될 때 까지 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습니다.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1 In his name the nations will put their hope.'

이사야 42:4 의 기록은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입니다.

  ‘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는 ‘거주 가능한 땅’이고 내륙지방과 구분되는 해안 지방(coast)을 말합니다. 해안 지방은 일부가 베니게 인과 블레셋 인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라서 ‘섬’이라는 말이 때로는  ‘이방’이라는 의미를 나타냈습니다. 

  ‘이름’ 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바라리라’(will put their hope ) 는 ‘기대한다, ‘기다린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방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의 진리를 요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명확하게 선언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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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22-30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2 Then they brought him a demon-possessed man who was blind and mute, and Jesus healed him, so that he could both talk and see.

마태는 말못하는 사람의 병원인을 ‘귀신 들려’ 라고 명확히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이 귀신의 힘이라고 모함하는 것이 모순 됨을 지적한 것입니다.

 ‘ 예수께서 고쳐주셔서’ 라고 치유 기적에 대해서는 간단히 표현한 이유는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에 더 관심을 기울여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의 영적 장애를 근원적으로 치유하여 육체적인 장애 (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육적으로 온전한 구세주이십니다.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3 All the people were astonished and said, 'Could this be the Son of David?'

  ‘ 무리가 다 놀라’는 이유는 영적으로 죽은 유대지도자들의 교훈을 듣다가, 예수님의 생명력 넘치는 기적 앞에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반신반의하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다르니,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치유 기적은 혹시 메시야의 징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 같은 권세를 행사하지 않고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시니,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 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병고침을 받거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 이실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됩니다.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4 But when the Pharisees heard this, they said, 'It is only by Beelzebub, the prince of demons, that this fellow drives out demons.'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보고도,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희망을 가진 자들의 말을 거부합니다. 그 말의 확신을 제거하고자,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렸다고 몰아부칩니다. (막 3:30, 요 8:48)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5 Jesus knew their thoughts and said to them, 'Ever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will be ruined, and every city or household divided against itself will not stand.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인지 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  ‘동네’ ‘집’ 같은 공동체가 있다면 이런 집단은 내부의 분쟁으로 완전히 파멸될 것입니다. 사단이 그의 부하인 귀신을 조종하는 사단의 나라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만약, 사단이 그의 부하들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쫓아 낸다면, 그것은 자신을 내쫓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부하들이 그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모든 상황에서,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악의 세력은 귀신들입니다. 사단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악의 실체입니다.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6 If Satan drives out Satan, he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then can his kingdom stand?

  사단의 나라에서 자신의 부하세력인 귀신이 사람을 사로 잡고 있다면, 그를 축출하면, 그들이 나라는 파멸됩니다.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 재림때 까지 분명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7 And if I drive out demons by Beelzebub, by whom do your people drive them out? So then, they will be your judges.

  ‘너희의 아들들’은 ‘너희 바리새인 사람들’ (your people, NIV)을 의미 하거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됩니다. 바리새인과 그 제자들 역시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를 했습니다. (왕하 21:6, 대하 33:6,)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상황과 관습에 의존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흔했습니다. 다음은 유대역사가 요세프의 보고에 나온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귀신 축출법을 터득해서 각종 질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귀신 축출법(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바리새인들 말대로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냈다 라고 한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블의 도움으로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되지 않느냐 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요지 입니다.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라고 하신 이유는, 만약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았다고 믿으면서 예수님만 귀신의 능력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부당한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 반론은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진퇴 양난에 빠집니다. 자기들 제자들이 하는 귀신 축출 행위가 바알세블에 의한 것이라 할수도 없고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이 능력이라고 주장할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8 But if I drive out demons by the Spirit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예수님의 귀신 축출행위를 사단과 연관 시키는 것은 논리적 모순 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의한 것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신 것은 사단의 왕국이파괴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령이 현재 역사하고 계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육신 사건으로 이 땅에 실제 도래 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도래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already)도래 했으나 아직 (not yet) 않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9 "Or again, how can anyone enter a strong man's house and carry off his possessions unless he first ties up the strong man? Then he can rob his house.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에서   ‘강한 자’란 사단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 내심으로, (1)자신이 이미 사단을 결박하고 있다고 하시고, (2)자신이 귀신의 왕인 사단보다 더 강한 자 (더 능력이 많으신 이 )이고, (3)이 세대의 종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다고 보여주십니다.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에서 ‘세간’의 문자적 의미는 ‘그릇들’입니다. 이 말은 결국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 즉, 귀신들린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사단이 마음대로 지배하던 이 세상의, 영혼과 육체 모두 마귀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은 , 마치 세간을 빼내듯이 한 사람씩 빼앗아서 악의 세력에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 모두를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보내고 ,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미 도래한 메시야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사단의 소유물이 되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품으로 회수하시는 시간 입니다,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0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he who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와 반대 의미는 단순히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무관심한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의문을 제기하는자’ 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서로 투쟁할 때, 중립적 입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든지, 그 반대이든지가 명백한 것입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는 바리새인 같은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야로 고백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사단의 힘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을 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흩어버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모으고 또 모으는 것입니다. 사단은 되찾은 양을 다시 빼앗고 그들을 흩어버리려는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은 예수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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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31-32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1 And so I tell you, every sin and blasphemy will be forgiven men, but the blasphemy against the Spirit will not be forgiven.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하고 풍부하시니 인간의 모든 죄악은 도말될 수 있습니다. (시 63:633,사 1:18,요이1:7)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알세블의 힘이라 매도했었습니다. (24절)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여 살펴봅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 부터 영원히 발생하시는 분으로서 (요 15:26, 16:7, 롬 8:9,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습니다. 그 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시고, 예수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시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여 더 성숙한 신앙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부를 경원시 하고 성자를 미워할지라도 (딤전 1:13), 이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는 역사 덕분에 참회의 자리에 설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하고, 모독하는 것은, 참회하여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기에 결국은 심판에 이르는 불행한 결과로 가게 됩니다. (요 3:36)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규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로 알고도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 입니다. (민 15:30, 히 6:4-6, 요일 5:16)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치는지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알지 못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임의 인지하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들어오셔서 감동, 감화 하심에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이 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참회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고의적으로 성령에 대항하려는 고집스럽고 악의에 찬 심령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2 Anyone who speaks a word against the Son of Man will be forgiven, but anyone who speak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either in this age or in the age to come.

  ‘인자를 거역하면 ‘에서 인자는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거역하는 불신앙인들이 만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면, 예수님의 주장과 사역을 거역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인자를 거역하게 되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그 죄가 돌이 킬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거역하면’은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사역과 그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라고 하심은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 사람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마치 마귀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범주 밖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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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33-37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3 'Make a tree good and its fruit will be good, or make a tree bad and its fruit will be bad, for a tree is recognized by its fruit.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에서 이 나무와 열매는 성령 충만하신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치유의 선한 결과를 의미합니다. 두번째 나무와 열매는 스스로 악해서 (나무) 성령을 방해하는 말 (열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말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정의를 외치는 예수님의 열매의 나무는 당연히 선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의 열매를 부인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나무를 비방했습니다. 그들의 거짓이 예수님의 논리적인 반박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나무(근본)과 열매(결과) 모두 선한 교사이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소개하고 변호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선생님 이셨습니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4 You brood of vipers, how can you who are evil say anything good? For out of the overflow of the heart the mouth speaks.

 ‘독사의 자식들아’는 세례 요한도 바리새인의 본성을 지적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에게도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체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마음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5 The good man brings good things out of the good stored up in him, and the evil man brings evil things out of the evil stored up in him.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에서 ‘쌓은 선’은 마음의 창고에 쌓아 둔 선한 마음 입니다. 선한 창고에서 선한 말이 나옵니다. 

  착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에게 유익한 말을 하게 되고, 악한 마음씨에서 악한 말이 나옵니다.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6 But I tell you that men will have to give account on the day of judgment for every careless word they have spoken.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에서 ‘무익한’[라르곤]은 [아]라는 부정접두어에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이 합성된 단어로 ‘부주의한’, ‘쓸모없는’ 등을 뜻입니다. 본절에서 이 말은 생명력이 없는 ‘무의미한, 무가치한 (insignificant, stendahl,peak) 도덕적으로 무익한 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말을 일일이 다 아십니다. 심판의 날에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과 ‘무익한 말’ 까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갈 6:7,엡6:8) 인간이 현재 사용하는 언어생활은 우리 마지막날의 영광과 오욕을 결정하는 중요한 가늠이 됩니다. (엡 5:3,4,골 3:17, 약 1:19)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37 For by your words you will be acquitted, and by your words you will be condemned.'

 ‘의롭다함’과 ‘정죄함’의 기준은 선한 말을 했느냐, 악한 말을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과 행동은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선한 말을 할수 있고,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수준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듯이 인간의 말에 의해 ‘정죄함’과 ‘의롭다함’을 그 마지막날에도 구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말’ 의 헬라어[로고이]는 단순한 음성인  말이 아니라, 말하는 자의 의식과 내재된 지식을 담고 있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결국 심판의 대상은 입술 드러난 화려한 말이 아니라, 그 속마음에서 나온 말임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깊은 생각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22:18, 요 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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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38-45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8 Then some of the Pharisees and teachers of the law said to him, 'Teacher, we want to see a miraculous sign from you.'

  ‘표적’ [세메이온]은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통해, 초자연적인 사실이나 진리를 나타내 주거나, 어떤 예언을 확증 해주는 것입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의 왕국을 건설하고, 천군천사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도 그것을 사단의 영향력이라고 몰아부치며 예수님을 모독했습니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39 He answered, 'A wicked and adulterous generation asks for a miraculous sign! But none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

 예수님은 이세대가 도덕적으로 타락하니 악하고, 하나님께 불충실하기 때문에 이들을 음란하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이 음란의 의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결혼 한 부부와 같은 관계이니,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하고 우상숭배행위를 하는 것을 간음 (adultery)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은 요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행한 어떤 표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죽음에서 구원 받고 나서야, 니느웨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구원 받았듯이,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 으로 사흘간 그의 시체가 무덤에 안장 되었다가 제 3일에 부활 될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야 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시고, 메시야의  표적이 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0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밤낮 사흘’이란 개념은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에 의한 표현입니다. 랍비들은 한 날( a day) 과 한 밤(a night)을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한 묶음의 일부분이라도, 단위상 묶음 전체로 이해했습니다 (삼상 30:12. 에 4:16) 그러니, 전통 해석대로라면, ‘밤낮 사흘’ 은 단순히’세 날들’ (three days)를 의미할 수도 있고, 밤이나 낮이 셋으로 결합된 것, 2박 3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3일’ (on the third day)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고 기록된 것입니다. (16:21)

  ‘땅 속에’는 문자적으로는 ‘땅의 심장에’( in the heart of the earth)인데, 이것은 요나서 2:2 ‘스올의 뱃속’ ‘음부의 심장에’라는 표현을 따라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체가 땅속 무덤 속에 안치 될 것을 의미합니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1 The men of Nineveh will stand up at the judgment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for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now one greater than Jonah is here.

  요나와 예수님은 모두 죽음에서 구원받게 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전도받은 대상자들은 서로 정반대였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습니다.(욘 3:1-10)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입증된 이 세대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일어나서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2 The Queen of the South will rise at the judgment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for she ca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to listen to Solomon's wisdom, and now one greater than Solomon is here.

  ‘남방 여왕’은 아라비아 반도의 여왕으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왕상 10:1-13). 에티오피아의 여왕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열정적인 탐구열로, 먼나라 이스라엘에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려 왔습니다. 지혜의 근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본다면, 그녀는 심판 날에 이들을 송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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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43-45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3 'When an evil spirit comes out of a man, it goes through arid places seeking rest and does not find it.

  이 부분은 22-37절의 바알세불 논쟁과 연결된 귀절입니다. 누가 복음11:24-26의 평행되는 귀절에서, 이 비유는 개인에게 해당되고 마태복음은 나라(nation)에 적용되는 것입니다.1) 유대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학사 에스라와 느헤미야등의 선지자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 종교적 혼합주의, 잡혼 등의 불결했던 관습을 제하였고, 이 기간 동안은 더러운 영이 이스라엘에게서 나간  시기에 해당됩니다. 2) 영적인 측면을 본다면, 의식과 바리새인의 잘못된 사상으로 고통을 받던 유대민족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과 (귀신을 쫓아내는치유),  바알세불 논쟁등을 듣고는 예수님에 대해서 중립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는 귀신이 사막이나 광야를 좋아한다는 견해입니다. ‘물 없는 곳’은 거주지가 없는 곳 (욥 30:3, 시 107:4-7)이고, 원기를 회복할 수 없는 척박한 곳입니다.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는 귀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거하며 그 인간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기 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귀신이 원하는 거처는 맑고 깨끗한 영혼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입니다. 진실과 불의의 중간에서 회색빛 태도를 취하는 영혼 입니다. 그곳을 찾기 까지 그는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 찾아 헤맬것입니다.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4 Then it says, 'I will return to the house I left.' When it arrives, it finds the house unoccupied, swept clean and put in order.

  귀신은 그 전에 자신이 점거했던 사람 (인격)을 ‘내 집’이라고 부르고 그 곳을 여전히 자기의 소유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으로 짐작하자면,  귀신이 적어도 자신이 점거했던 한 인격체의 본질적인 특성이나, 신앙, 의지적 특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에 해당하는 시기는 (1)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의 우상 신상들을 파괴했지만,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는 종교는 여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2)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에 흥미를 느끼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악한 대항을 삼가고 중립적태도를 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불의와 적극적 악의가 없다는 것은, 거룩한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 입니다. 오직 전적인 헌신이냐 전적인 부인이냐 만 있을 뿐입니다.

  ‘수리되었거늘’ [케코스메메논] 는 헬라어 동사 [코스메오] 의 완료수동분사로, ‘장식되어 졌다’입니다. 바벨론에서 이미 종교 혼합주의에 물들어 더러운 악령의 영향력을 심하게 받았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주의 은혜로 그 악령의 영향력에서 벗아났더라도, 율법적, 형식적인 태도로만 신앙생활을 하니 하나님 말씀의 참된 정신은 가려진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들에게 참된 영적인 변화가 완료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5 Then it goes and takes with it seven other spirits more wicked than itself, and they go in and live there. And the final condition of that man is worse than the first. That is how it will be with this wicked generation.'

  ‘일곱’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숫자로, ‘완전한, 더이상은 생각할수 없을 정도의 양과 질’을 의미합니다. ‘일곱귀신’은 가장 강하고 악한 귀신을 상징합니다. 역사적인 의미로 보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왕(B.C.356-323)의 침략과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를 상징합니다. 안티오커스는 페르시아 이후로 유대인에게 보장되던 종교상의 특권을 박탈하고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우스에게 제사드리도록하고 참여를 강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발하자,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부렸습니다.

  악한 세대가 이 시대처럼 박해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형편이 이전보다 더욱더 비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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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Matthew 12:46-50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6 While Jesus was still talking to the crowd, his mother and brothers stood outside, wanting to speak to him.

  여기서 언급된 형제들은, 모친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 입니다 (13:55-56).카톨릭에서는, 신약성경과 초대 교부들과 다른 견해를 주장합니다. ‘형제들’은 요셉과 전처 사이의 아들들이라거나, 남자 친척들이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만약 ‘형제들’을 전처 소생이라고 주장한다면, 예수님은 법적인 측면에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또, 같은 이름을 가진, 마리아의 여동생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일반적으로 동일한 이름으로 두 딸을 부르지  않는 다는 걸 생각하면 억지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훗날 예수님이 최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들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셨습니다. (요 19:25)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사건에도 계셨습니다. (행 1:14)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핸15:13, 21:18, 고전15:7,갈1:19)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7 Someone told him, 'Your mother and brothers are standing outside, wanting to speak to you.'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전통적인 권위를 지닌 바리새인들의 대적자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고, (2) 예수님이 너무나 많은 지역의 선교를 하고 있어서 그의 건강상 어려움을 염려하였고 (막 3:21), (3)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신 것에 대한 의구심때문에 (4:13, 눅 4:16-31, 요2:12) 이런 이유들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노력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직접 접촉하는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눅 8:19)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8 He replied to him, 'Who is my mother, and who are my brothers?'

  이 내용은 혈연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 19:26,27) 이 말은 출생과 유전에 의한 혈연관계 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더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적가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이 땅의 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가족과  혈연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것 임이니라”(호 1:9) 하신 선언의 의미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님의 로암미(Lo-Ammi) 선언에 해당됩니다.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해서 개별적으로, 각자의 인격들 모두가 영원히 선택된 백성이라고 볼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는, 비록 혈연적인 가족 일지라도,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가족이 될 수 없다고 선언 하시는 것입니다.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49 Pointing to his disciples,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제자들에게 사랑을 담은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자신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성(聖)가족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로써 신앙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이들 중 나약한 본성 때문에 넘어지는 이가 있을 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를 향해 내 가족, 내 형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롬 8:17,29, 히2:11)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이는,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이 성(聖)가족은 개방되어 있어, 널리, 무한대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가족은 빈부 차이, 지역, 문화, 사상, 계급간의 차이 없이 , 영원히 세대를 넘어서 대상은 확장됩니다. 이는 만유(all thing under the sun)의 주인이시고, 만유보다 크신 분이 바로 이 가족의 친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가 무조건적인 개방성을 띤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제한성과 배타성이 내포됩니다.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동참하는 자’ 라는 절대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신령한 가족을 정의하는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입니다(눅 8:21).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이고, 믿음의 식구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는 초자연적인 신비를 함축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절대적 존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부자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어떤 의롭고 선한 일을 몸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 의지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애쓴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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